제안서를 쓰지 않은 지 두 달 — 제안서 담당 AI 에이전트 '박승우'

앞 글에서 한 줄로 지나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제안서를 쓰지 않은 지 두 달이 넘었다는 것.
제 시간을 가장 많이 가져가던 일
기업교육은 제안서에서 시작됩니다.
고객사에서 교육 문의가 오면 먼저 그 회사를 알아봐야 합니다. 어떤 업이고, 무엇이 급하고, 이 교육을 왜 지금 하려는지. 그 다음에 대상자에 맞는 과정을 설계하고, 시간을 배분하고, 실습을 짜서 문서로 만듭니다.
한 편에 짧아야 두 시간, 길면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강의와 같은 시간대에 벌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강의가 있는 날에는 손도 못 댑니다. 그래서 늘 밤으로 밀렸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 피곤한 몸으로 늦게까지 제안서를 붙들고 있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빨리 쓰는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안서가 잘 나와야 그 사업을 수주하고 실제로 강의를 진행할 수 있으니, 대충 쓸 수가 없는 문서였습니다.
그래서 기획자를 뽑았습니다
두 번째 팀원이 박승우입니다.
원작에서 승우는 컬러폰이라는 역전의 히트작을 만들어낸 상품기획자입니다. 그 재능을 알아보고 밀어준 사람이 한유현이고요. 웹툰에서 죽이 잘 맞던 이 둘을 저희 팀에서 다시 붙여봤습니다.
제안서를 맡길 자리에 기획자를 앉힌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은 "요청서대로 정리해줘"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청서에 적힌 말 뒤에 있는 진짜 문제를 읽어야 하는데, 그건 시키는 대로 하는 일이 아니라 기획하는 일입니다.
맨땅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승우가 빠른 진짜 이유는 손이 빨라서가 아닙니다. 이미 쌓아둔 것 위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앞 글에서 말씀드린 위키가 여기서 쓰입니다. 저희가 그동안 진행해온 과정들이 거기 다 들어가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 어떤 대상자로 몇 시간을 어떻게 구성했고, 그때 무엇이 잘 됐는지까지요. 문의가 들어오면 승우는 먼저 그 안에서 맞는 과정을 찾습니다. 비슷한 게 있으면 그걸 이 고객사에 맞게 다시 조정합니다.

문제는 없는 경우입니다. 처음 다루는 주제이거나, 있던 과정을 크게 손봐야 하는 경우요. 이때는 바로 문서를 쓰지 않습니다. 저와 먼저 깊게 파고드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 주제가 실제로 무엇인지, 이 대상자에게는 무엇이 걸림돌인지, 어디까지 다뤄야 현업에서 쓰이는지를 놓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대화가 끝난 다음에야 과정 설계로 들어갑니다.
새로 설계한 과정은 다시 위키로 들어갑니다. 다음 문의 때는 그게 또 재료가 됩니다.
요즘은 이렇게 돕니다
강의를 하다 쉬는 시간에 잠깐 확인하면 초안이 벌써 나와 있습니다.
유현이가 "이번 주는 이 제안서가 급합니다" 하고 넘기면 승우가 회사를 조사하고, 저희가 가진 과정 중 무엇이 맞는지 대조하고, 대상자에 맞게 구조를 다시 짜서 초안을 만듭니다. 담당자와 통화한 내용이 있으면 그것도 반영해 옵니다.
한 장이 아니라 세트로 옵니다
제가 승우에게서 배운 게 하나 있습니다.
제안서는 한 사람만 읽는 문서가 아닙니다. 저에게 문의를 준 교육담당자가 읽고, 그 담당자가 내부 결재를 올릴 때 윗선이 읽고, 나중에 강의실에 앉을 학습자가 읽습니다. 세 사람이 알고 싶은 것이 전부 다릅니다.

그래서 승우는 제안서 한 장만 내지 않습니다. 결재를 올릴 담당자를 위한 요약본을 따로 만들고, 사전에 보낼 커리큘럼 문서를 따로 만들고, 강의실에 붙일 학습자 공지도 따로 만듭니다. 계약 단계가 되면 계약서 초안까지 잡아둡니다.

읽는 사람이 다르면 문서도 달라야 합니다. 저는 이걸 알면서도 시간이 없어 못 하고 있었습니다.
보낸 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제안서는 한 번 보내고 끝나는 문서가 아닙니다.
보내고 나면 대개 연락이 옵니다. 시간을 줄여달라, 대상자가 바뀌었다, 이 부분을 더 넣어달라. 그때마다 문서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예전에는 이게 파일 이름 뒤에 붙는 숫자로만 남았습니다. 최종, 최종2, 진짜최종.

지금은 제안서를 전부 한곳에 모아두고 버전으로 관리합니다. 지금까지 만든 제안서가 그 화면에 다 올라가 있습니다. 고객사 서른 곳 남짓, 마흔 건이 넘습니다. 어느 회사에 무엇을 언제 보냈고 지금 몇 번째 버전인지가 한눈에 보입니다.
가장 많이 고친 건은 일곱 번째 버전까지 갔습니다. 요청이 올 때마다 다시 만들었다는 뜻인데, 예전 같으면 그 일곱 번이 전부 제 밤 시간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제가 하는 일
승우가 초안을 만들어도 최종적으로 이 고객에게 보낼지, 무엇을 강조할지는 제가 정합니다.
승우는 손이 빠르고 꼼꼼합니다. 그러나 "이 고객에게 지금 이 톤이 맞는가"라는 판단까지 넘기지는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 오히려 마음 놓고 일을 넘기는 방법이었습니다.
밤에 제안서를 붙들고 있던 시간이 비었습니다. 요즘 그 시간에는 책을 씁니다.
혹시 매일 밤으로 밀리는 일이 하나 있으시다면, 그 일이 시키면 되는 일인지 기획이 필요한 일인지부터 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구분을 하고 나서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다음 편은 두 달 동안 앱을 스무 개 만든 팀원 이야기입니다. 장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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